유월절 날짜는 언제인가

유월절 날짜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약속하신 날이 바로 유월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이들이 유월절 날짜를 궁금해한다. 전 세계 인구 중 약 30%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오늘날, 왜 유월절은 생소한 절기가 되고 말았을까? 역사를 통해 살펴보자.

유월절 날짜 최후의 만찬
새 언약 유월절은 빛바랜 그림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버렸다. (최후의 만찬 – 레오나르도 다빈치 作)

유월절 날짜 논쟁

예수님께서 전하신 유월절은 하나뿐이다. 논쟁이 벌어질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왜 교회들은 유월절이 언제인지 다투게 됐을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사도들은 유월절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유월절을 통해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념했다. 사도들은 이러한 정신을 초대교회에 고스란히 전해주고자 노력했다(고린도전서 5:7~8, 11:23~26). 그러나 사도들이 차츰 세상을 떠나면서 유월절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조는 로마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초창기 로마 교회에는 하층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권력자들이 많이 입교하자, 로마 교회는 차츰 주변 교회들에 영향을 미쳤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월절 날짜 논쟁이었다.

예수님 이래로 동방 교회는 유월절을 꾸준히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지켰다. 그러나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들은 유월절 성찬식을 부활절과 함께 지키기를 원했다. 양측의 상반된 견해는 155년에 본격적으로 충돌한다.

155년, 폴리캅 vs 아니케터스

서머나(현재의 터키 이즈미르)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로마 교회의 감독(현재의 교황) 아니케터스와 이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폴리캅(폴리카르푸스)은 사도 요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였다. 그는 요한이 그랬듯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폴리캅은 아니케터스(아니체토)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아니케터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서로 다르게 그 날을 지키기로 합의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듬해 폴리캅은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당했다.

197년, 폴리크라테스 vs 빅터

유월절 날짜 논쟁은 197년에 다시 점화되었다. 로마 교회의 감독 빅터(빅토르)가 ‘도미닉의 규칙’을 공포한 것이다. 도미닉의 규칙이란, 모든 교회는 부활절에 성찬식을 하라는 일종의 명령이었다. 대부분의 교회는 도미닉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시아의 교회들은 아니었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크라테스가 대표적이었다. 그가 빅터에게 보낸 서신은 차분하지만 단호하다.

“우리는 진정 올바르게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아무것도 덧붙이거나 감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 이 사람들은 모두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신앙의 규칙을 따르면서 복음에 따라 14일을 유월절로 지켰습니다 … 나는 나를 협박하기 위해 취해지는 모든 일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들은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빅터는 이 서신을 받은 즉시 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을 파문시켰다. 그러나 이 처사가 교회들의 일치된 견해는 아니었다. 결국 빅터는 자신이 내린 징벌을 철회했다.

니케아 공의회에 관하여

유월절 날짜 논쟁이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난 때는 325년이다. 니케아 공의회를 빼놓고는 유월절 날짜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니케아 공의회의 주된 논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유월절 날짜 변경된 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체사레 네비아 作)

소집 배경

니케아 공의회를 주최한 이는 콘스탄틴 황제다. 그는 많은 정적들과 싸워 이긴 끝에 왕좌를 차지했다. 황제가 되었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직 많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내전으로 어지럽던 로마를 통합시키는 일이었다. 콘스탄틴은 나라의 결속에 기독교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독교는 당시 큰 내홍을 겪고 있었다. 아리우스로 인한 이단 논박에 유월절 날짜 문제까지 겹쳐서 그야말로 심각한 분열 상태였다. 콘스탄틴으로서는 난감했다. 기독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던 그에게 이런 상황이 달가울 리 없었다. 결국 325년 5월, 그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니케아(현재 터키의 이즈니크)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주요 논제

1. 유월절 날짜 문제

앞서 서술했듯 동·서방 교회는 유월절 날짜에 관한 견해가 서로 달랐다. 서방 교회는 부활절을, 동방 교회는 성력 1월 14일 저녁을 중시했다. 애당초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한 세기가 넘도록 지속된 논쟁은 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 아리우스주의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된 또 하나는 아리우스 때문이다. 아리우스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금욕주의적인 태도와 능숙한 설교로 인해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학설은 그의 이름을 따 ‘아리우스주의’라고 불렸다.

아리우스주의는 이집트를 넘어 동방 전체에까지 확산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었다. 콘스탄틴으로서는 교회가 분열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결의

콘스탄틴은 부활절에 성찬식을 행하기로 결정하고 출석 회원 일동이 이 내용을 담은 신경(信經)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아리우스를 파문시켰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에 옹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했다. 콘스탄틴은 당시 영향력이 강한 로마 교회의 편을 들어주었다. 하나님의 뜻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황제의 권위에 의해 유월절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성력 1월 14일 저녁의 유월절은 이단시되었다. 일부 성도들은 유월절을 지키다 많은 박해를 당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면 사막이나 산중, 동굴로 숨어야만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유월절 날짜가 중요한 이유

어떤 이들은 유월절 날짜를 따지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긴다. 유월절이든 부활절이든 아무 날에나 성찬식을 하면 된다고도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아무 날에나 성찬을 행하시는 본을 보여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력 1월 14일 저녁을 간절히 기다리셨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 22: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5)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력 1월 14일 저녁. 그달 그날에 유월절을 지킴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의 크신 사랑을 기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다.

유월절 날짜 올바로 지키기를 원하고 원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본 보여주신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참고자료>

간추린 교회사, 이종기, 세종문화사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엄정옥 譯, 은성출판사